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풍전쟁 (문단 편집) == 결말 == 6월 16일, 펑위샹은 옌시산의 공동행동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이 출국하기를 원한다고 통전하며 옌시산에게 의탁했다. 펑위샹은 자신의 타이위안 행이 화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변명했으나 이미 상태가 너무 불리해져서 옌시산과 합작하지 않으면 세력 보존이 불가능해졌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제스는 리지천의 연금 조치를 해제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고 염풍합작을 우려하여 옌시산에게 펑위샹과 공동외유를 하지 말라면서 5월 29일부터 옌시산과 베이핑에서 협상했다. 여기서 옌시산은 펑위샹에 대한 체포령 취소를 얻어냈고 장제스는 옌시산의 선편견후출양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6월 25일, 옌시산은 펑위샹이 타이위안에 도착하자 오대현 건안촌의 건안사에 연금시켰다. 권고를 받아들여 그의 근거지 타이위안으로 도망쳤다. 옌시산은 펑위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위한 군사회의 소집에 들어갔고 국민정부도 [[7월 5일]] 펑위샹의 체포령을 취소를, [[7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전시체제의 취소를 결정함으로 펑위샹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서산회의파]]도 쩌우루를 제외하고는 다시 평진 지역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여러 군사실력자들과 제휴하여 강경하고 지속적인 반장운동을 벌이는 서산파의 모습은 국내의 이목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9월에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11월 광서파의 잔여세력이 합세하면서 [[2차 장계전쟁]]이, 12월에 [[스여우싼]], [[탕성즈]]가 합류하면서 [[장당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옌시산의 사주로 10월, 펑위샹의 잔여세력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